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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의 영광 입어 행복”

백범 김구 선생의 역할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 연기력 또한 뛰어난 배우 이영후(사진)씨가 지난 7월 1일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시카고로 이주했다. 지난 13일 몰튼그로브 소재 산수갑산 한식당에서 만난 이영후씨는 77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이영후씨는 “이렇게 중앙일보가 반갑게 맞아줘 감사하다. 아내의 폐암 수술 후 1년 8개월의 회복기간을 가졌다. 당시 주방에서 아내의 외로운 뒷모습을 보며 나 혼자서 그 위로움을 채워줄 수 없다 생각했다”며 “딸들과 손주들이 아내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아내를 위해 미국으로 오기로 결심했으며 현재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이 씨는 연세대 2학년 재학 중 오태석 작가가 희로무대를 창단, 그곳에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데뷔와 동시에 제1회 신인예술제 연기상을 수상했으며 1969년도에는 방송에 데뷔해 술꾼 A, B로 출연하며 방송을 시작했다. 이 씨는 “제 1공화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역을 맡았다. 많은 분들이 나를 알아보고 김구 선생이라고 부를 때마다 송구스러웠다”며 “이 후 김구 선생이 오버랩되어 연기생활에서는 힘든 점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영후씨는 1986년 ‘MBC 베스트셀러극장- 처세술 개론’에서 ‘춘생’역을 맡아 연기자로 도약하는 계기를 가졌으며 87년도 ‘산하’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이 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역은 ‘제 4공화국’의 ‘장태완’역”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이 씨는 “김구 선생의 영광을 입어 40년 넘는 연기생활이 행복했었다. 하지만 사랑하다 죽는 역을 못해 본 것은 아쉬웠다. 취미는 골프인데 건강관리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라며 “향후 과거의 경험을 살려 신문에 기고를 하고싶다”라는 바람을 나타냈다. 장제원 기자

2016-07-15

[열린 광장] 김구 선생 65주기를 맞는 각오

백범 김구 선생. 대부분의 사람은 분명 그분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점차 그를 잊혀지게 하고 있다. 그분의 정치철학이 망각되고 있으며 그분의 조국애와 민족애가 퇴색돼 가고 있다. 6월 26일, 오늘은 선생의 65주기다. 대한의 사람들은 선생의 고귀한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억하며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를 추모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보냈으면 한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감옥에서 고초를 받으면서도 "소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두세 번 소원을 물었을 때도 "내 소원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외쳤다. 또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라고 했다. 같은 민족끼리 사상과 이념으로 분열하지 말고 반목을 단합으로 살아갈 것을 당부한 것이었다. 선생께서 가신 지 어언 65년. 대한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민족의 갈 길을 열어주며 국가와 민족의 안녕만을 갈구했던 김구 선생셨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민족은 사상 분열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으며 정치가 안정되지 못한 현실에서 선생의 소원이었던 겨레가 함께 잘 사는 나라의 꿈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1949년 오늘, 경교장에서 총탄에 쓰러진 김구 선생의 추모일을 맞이하며 선생의 평생소원이었던 "아름다운 나라, 잘사는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우리도 함께 걸어가자.

2014-06-25

"3·1 독립선언서 목숨 걸고 김구 선생에 전달"

“일본은 한민족에게 저질렀던 죄악을 반드시 사죄해야 합니다.” 일제 침략에 고통 받던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치욕스런 나날을 보내던 우리 선조들은 이날을 기점으로 활발하게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게 된다. 3·1운동 당시 발표된 독립선언서가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에게 전달된데는 밸리에 거주했던 독립투사 고 김춘하 선생의 보이지 않는 공이 숨어 있다. 김춘하 선생은 지난 83년 별세했다. 3·1만세 운동의 당시 멀리 상해에서는 여운형ㆍ김구 선생 등이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3·1정신이 담긴 독립선언서가 필요했다. 22살의 나이에 신우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춘하 선생은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상해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할 사람이 필요하단 말에 목숨을 건 여정을 떠난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은 그를 끈질기게 추격했고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신의주와 청도를 거쳐 간신히 상해에 도착해 김구 선생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목숨을 건 용기로 임시정부는 3·1정신을 이어 받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지만 김춘하 선생은 상해에서도 일본 헌병의 끈질긴 추적을 받게 됐다. 결국 그는 하와이를 거쳐 LA로 피신했고, 1922년 밸리지역에 자리를 잡은 후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흥사단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과 후진양성에 매진했다. 그 후 그는 미주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한인회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당시 활동하던 인사들과 함께 1962년에 캘리포니아한인센터 설립위원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자칫 잊혀질뻔한 김춘하 선생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그와 함께 밸리장로교회에 다녔던 남준희(85)씨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자비를 털어 3·1절에 맞춰 김춘하 선생의 스토리를 신문에 광고로 싣기로 한 것. 광고에는 남씨가 직접 손으로 작성한 독립선언서 원문과 한극 번역본도 실려 있으며 반기문 UN사무총장으로부터 받은 엽서도 담겨 있다. 무엇보다 3·1운동 95주년을 맞아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며 '대한독립 만세'라는 문구도 적어 넣었다. 1974년 B형간염 치료를 위해 도미한 남씨는 이듬해 김춘하 선생을 만났다. 강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진 그에게 매료된 남씨는 함께 흥사단 활동을 했다. "김춘하 선생께서는 어린 저를 동지라고 부르셨는데 '제가 감히 어떻게 선생님의 동지입니까'라고 하면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조국이 통일되도록 노력하게나'라고 말씀하셨죠." 1983년 샌퍼낸도 밸리 그라나다 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김춘하 선생은 공을 인정받아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남씨는 한국에서 인천조선공업, 한국암면, 남국산업 등 굵직한 중소기업에서 사장까지 역임했지만 그를 통해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최근 일본이 우경화되는 모습을 보며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강제합방 등을 겪으며 우리 민족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죠. 일본은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진심어린 사과를 받드시 해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도 절대 아픈 과거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글·사진=신승우 기자

20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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